• 안중근의사기념관, 서울 중구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하였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 계발을 위해 ‘대학’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둥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븍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09년 초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 독립, 동양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다. 

1. 출퇴근, 산책, 운동, 관람, 여행을 떠난다.
2. 수어로 설명하면 좋을 것같은 안내문이 있는지 살핀다.
3. 스마트폰으로 안내문을 촬영한다.
4. 개인 SNS에 올린다. 해시태그 #QR수어 #큐알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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