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박물관, 서울 중구
3•1운동과 유관순
“저는 나라에 몸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나라는 독립될 것 입니다.”
3•1운동 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내려간 유관순은 바로 동지를 규합,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모여든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유관순이 나눠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대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 없는 주민 3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유관순은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 고 핀잔을 주자 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쳤다. 이로 인해 법정 모독죄가 추가돼 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관순은 이화학당의 스승인 박인덕 여사를 만나 “선생님,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왜놈에게 피살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라에 몸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천만 동포의 십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될 것입니다.” 라고 의연히 말했다. 1920년 3월 1일에는 옥중만세를 주동하는 등 끝까지 저항했으나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인 19세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 출퇴근, 산책, 운동, 관람, 여행을 떠난다.
2. 수어로 설명하면 좋을 것같은 안내문이 있는지 살핀다.
3. 스마트폰으로 안내문을 촬영한다.
4. 개인 SNS에 올린다. 해시태그 #QR수어 #큐알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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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컨택센터, 이메일 hello@signconnect.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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